대한민국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다. 국방비 기준으로는 세계 8위다. 세계적으로 경쟁하는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인이 포진해 있다. 기업만 봐도 삼성전자·LG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 등 세계적 명성을 날리는 기업이 많다. 음악에서는 조수미를 비롯해 BTS와 싸이가 세계 정상 수준이다. 영화에서도 봉준호와 윤여정이 세계 정상을 찍었다. 박세리에서 시작한 여성 골프의 신화는 지금도 계속 새롭게 쓰이고 있다. 이런 분야에 노벨상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노벨상을 여럿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으로 눈을 돌리면 달라진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 방식의 대학 평가가 있다.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옛 톰슨로이터)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100대 대학’에 KAIST가 2017년 7위를 차지했다. 이 회사가 올해 선정한 ‘글로벌 100대 혁신 기업’엔 아시아 대학 중 KAIST가 유일하게 포함했다.
그러나 종합 평가라 할 수 있는 QS 평가에서 서울대와 KAIST는 40위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전 세계 수만 개의 대학 중 이 정도 하는 것도 대견한 일이라 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대한민국 국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아직 과학 분야 노벨상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위상에 걸맞게 되려면 20위 안에 드는 대학이 한두 개는 있어야 한다. 한국 대학이 국민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분발해야 할 점이다.
그러면 왜 한국 대학은 세계 일류대학이 되지 못했을까? 한국에서 후발로 출발해 수백 년 된 세계 명문대들과 경쟁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대학 구성원들이 세계 일류가 되겠다는 인식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국 어느 대학에서도 교수나 학생들이 세계 일류대학이 되겠다는 결의를 한 적이 없다. 뜻을 세우지 않았는데, 그것이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대다수 교수는 세계적 대가들이 하는 연구를 따라서 해 왔고, 학생들도 그것을 보며 자라왔다. 그동안 우리는 남이 정의해 놓은 문제를 열심히 풀어서 여기까지 왔다. 국내에서 도토리 키 재기 경쟁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이점에서는 국민도 마찬가지다. 우리 국민도 세계 일류대학을 하나라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직 세계 일류가 되지 못하고 있는 대학에 대하여 질책하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세계 일류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세계 일류들이 경쟁하는 곳에는 글로벌 게임의 룰이 있다. 예를 들어 월드컵 축구 대표팀은 한국 땅에 있지만, 한국식으로 게임을 하지 않는다. 글로벌 규칙에 따라 연습하고 게임을 한다. 그러나 한국 대학들은 한국 땅에 있으니 한국식으로 경쟁하라고 규정 받고 있다. 적어도 필자가 속한 KAIST에서는 그렇다. 머리는 세계를 향하면서도 몸은 한국 땅에 묶여 발버둥치고 있다. 이런 하소연을 아무리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반응이 없다.
필자는 한국 대학이 세계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대학 구성원들이 초일류 의식을 가져야 한다. 학생과 교수가 ‘나는 세계 일류’라는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나 자신이 일류라고 생각하면 시시한 일을 하지 않는다. 시시하게 남이 하는 일을 모방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하는 연구를 따라 하지 않는다. 세계 일류대학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문제를 찾아서 연구하여,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게 하는 대학이다.
둘째, 글로벌 리더를 길러내야 한다. 한국에만 머무르지 않고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활동하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다양한 가치관이 존재함을 가르쳐야 한다. 밤하늘에서 독특한 빛깔을 내는 별만이 눈길을 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교수가 남과 다른 연구를 하면 학생들도 배운다. 남과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나도 남과 다른 일을 해야지, 남과 다른 존재가 되어야지, 이렇게 생각한다. 남과 다른 존재가 되겠다고 마음먹으면 친구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어진다. 경쟁한다는 말은 같아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다. 남과 다른 독특한 별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면, 자잘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고 대범해진다. 글로벌 리더를 많이 배출하는 대학이 세계 일류가 된다.
셋째, 세계 일류대학을 만들겠다는 국민 공감대가 필요하다. 세계 10위권 나라에 걸맞은 대학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일류대학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KAIST를 벤치마킹해서 만든 홍콩과기대와 싱가포르 난양공대는 이미 KAIST를 앞섰다. 그들은 일류대학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이제 거꾸로 우리가 홍콩과 싱가포르가 어떻게 아시아 최고 대학을 만들었는지 배워야 한다. 글로벌 경쟁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주고 자율권을 주어야 한다. 재정 지원을 하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 국제적인 경쟁을 할 수 있게 거버넌스를 구축해주어야 한다.
앞으로 글로벌 대학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 대학들이 엄청난 물량 공세를 앞세워 치고 올라올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앞으로는 한국 대학들이 현재의 위치를 지키기도 어려울 것이라 전망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출발하여 세계 정상을 찍은 삼성과 봉준호에게도 환경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른 것이다. 이들이 했는데, 대학이 못할 이유가 없다. 단지 되지 못한 이유는 일류가 되겠다는 결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 일류 대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월드컵 축구 대표팀 경기는 모든 국민이 열광한다. 실적이 좋으면 손뼉 치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질책이 쏟아진다. 그러나 대학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관심하다. 한국 내에서 일류라는 대학이 국제적으로 40위에 머무르고 있는데도 야단치지 않는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냐고 묻지도 않는다. 장애물이 많아서 뛰기 힘들다고 말해도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글로벌 룰에 의해서 플레이할 수 있게 허용해 주어야 한다.
먼저, 세계 일류가 되려면 실적이 좋은 교수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한국에서는 실적이 나쁜 교수를 해고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에서는 교수 평가는 숫자에 의한 정량적 평가여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논문을 몇 개 썼으면 합격, 그렇지 않으면 불합격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이류 방식이다. 세계 일류대학치고 숫자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곳은 없다. 숫자를 기준으로 하면 숫자를 늘리는 쪽으로 발전하여 부작용이 크다.
KAIST는 10여년 전에 계량 평가를 없애고 정성 평가를 도입했다. 전 세계 전문가들의 평가서를 받아서 평가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KAIST가 창안한 방식이 아니고, 세계 일류대학들이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내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이 방식에 의해서 교수를 해임할 수 없다. 한번 채용되면 평생 보장되는 직장이 세계 일류가 되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둘째, 교수를 채용할 때 대상자의 전체 학력과 이력을 보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현재 교수와 연구직에도 블라인드 채용이 적용되고 있다. 그래서 출신 학교를 볼 수 없다. 연구교수와 박사후과정(포스트닥)을 채용할 때 활용 부서장이 심사에 참여할 수 없다. 블라인드 채용의 장점은 일반 직원 채용에서 발휘된다. 그러나 수월성을 강조하는 연구직에는 적용하면 안 된다. 월드컵 축구 국가 대표선수를 뽑는데 감독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머리는 세계를 향하지만, 몸은 한국식으로 묶어 놓고 있는 형국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설마 이것이 사실일까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