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펙티브
국제 정치란 전통적으로 이념과 하드 파워의 대결장이다. 힘을 가진 자가 약한 자를 겁박하고 이익을 취한다. 20세기 초까지의 제국주의 시대에는 무력으로 진입하여 식민지로 만들어 약탈했지만, 20세기 후반부에 들어서는 이념 기반의 세력 확장이 국제 정치의 논리였다. 그러나 이념 대결이 약화한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경제적인 이익이 국제 정치의 기본 관심이었다.
최근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과 중국의 긴장 국면을 보면 더욱 경제적인 요인이 중요함을 알 수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성장 잠재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현재보다 중국의 미래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지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새로운 현상은 미국이 중국의 현재보다 미래를 나타내는 과학기술을 더 걱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 국제정치는 지리적 위치 중심의 지정학이 좌우
21세기엔 기술에 바탕 둔 기정학이 핵심 요소로 떠올라
현재 지구촌 화두는 반도체·배터리·뇌공학·양자컴퓨팅
한국에도 큰 기회 … 10년 공들이면 성과 나올 수 있어
2018년 3월 미국은 중국과의 무역 분쟁을 선언하고 ‘중국의 경제 및 지식재산권 침략 보고서’를 통해 가장 큰 문제는 기술 유출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 확실한 기술 패권 국가가 되겠다는 ‘중국몽’의 미래 설계도인 ‘중국제조 2025’를 발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2020년 5월 ‘미국의 대중국 전략적 접근 보고서’를 발표하며 기술 패권 경쟁이 미·중 갈등의 근본 원인임을 밝히고, 중국의 강제 기술 이전과 지식재산권 침해에 대해서는 추가 관세 부과로 대응하겠다고 표명했다. 결국 미·중 갈등은 디지털 전환 시대에 기술 패권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임이 명확해졌다. 이러한 기술 경쟁은 세계 주요국간 복합적 대립 양상으로 발전하여 미국·유럽연합(EU), EU·중국, 한·일 갈등을 초래했다.
미국 정권이 교체되면서 바이든 정부도 기술 중심 기조를 유지하며 주요 국가들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2021년 4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5G·반도체 등 공동 투자에 관한 경제 협력을 약속했다. 한국과는 2021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반도체·배터리·바이오의약품 등 첨단 제품 생산을 위한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을 위해 긴밀히 협력을 추진할 것을 약속했다.
또 2021년 6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는 한국까지 초청하여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동맹국 연합 전략을 발표했다. 아울러 2021년 11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최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대중국 동맹국의 소재·부품·장비 공급망의 안정적인 유지를 강조했다.
현대의 국제 정치와 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들어가고 있다. 전통적인 이념이나 경제적 이익에서 기술 중심으로 변하고 있다. 과거의 국제 정치는 지리적 위치가 중요한 ‘지정학(地政學)’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21세기는 기술을 바탕에 둔 ‘기정학(技政學)’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지리적인 위치에 따라서 동맹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국에 필요한 기술·부품·특허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자국의 중요 산업 또는 첨단 무기의 부품 소재가 잠재적인 적국에서 들어온다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미·중 갈등과 동맹국들의 연합은 지정학적인 요소뿐 아니라, 기정학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형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국제 정치 담론을 보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국제 정치 담론은 국제 관계 현상에 집중하며 우리가 어느 쪽에 편을 서고 손을 잡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그런 대부분의 토론은 그다지 시원한 답을 도출하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표피의 현상만을 바라보는 현재의 틀 속에서는 답이 없다. 우리가 힘이 없는데 누가 우리 손을 잡아 준단 말인가. 우리가 스스로 힘을 기르면 된다.
겉모습 현상을 만들어낸 밑바탕을 바라보면 답이 보인다. 현재의 현상을 만들어 낸 산업과 기술을 보면 다른 패러디임이 보인다. 기정학 시대에는 기술이 국제 정치 현상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전략 기술을 가지면 서로 우리의 손을 잡으러 달려올 것이다.
기존 하드파워 시대의 전략 기술은 미사일·핵잠수함·핵무기 등의 국방 기술이었다. 이러한 기존 전략 기술은 국가 경제의 관점에서 보면 소비의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지출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국가 전략 기술은 반도체·배터리 등의 산업 기술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 산업 기술은 국가 경제를 튼튼히 해주면서 동시에 국가 안보도 튼튼히 해준다. 미국이 한국과 반도체·배터리 기술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안정적인 소재·부품·장비의 공급망 관리에 힘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의 지정학 국제 관계에서 한국은 상수(constant)이면서 종속변수였다.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변수(variable)는 주변국들이었고 한국은 그들이 설정해 놓은 환경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고민하는 처지였다. 지리적인 위치를 변화시킬 수 없고, 전략 국방 기술은 여러 가지 제약으로 개발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정학 시대에는 한국도 독립적인 변수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 가변적인 기술이 국제 정치에서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도 국가 전략 기술을 먼저 개발하면 판을 바꿀 수 있게 됐다. 미래의 전략 기술은 양자 컴퓨팅, 인공 광합성, 탄소 포집, 홀로그램, 뇌공학, 우주, 암호, 보안 기술 등이 될 것이다. 이 기술들은 약 10년을 열심히 파면 성과가 나올 수 있는 것들이다.
드디어 대한민국에 새로운 기회가 오고 있다. 강대국 틈에 끼어 있다는 지정학 패러다임을 벗어 던질 수 있게 됐다. 우리도 이제 국제 정치에서 주요 플레이어가 될 수 있다. 남들이 없는 기술을 가지고 산업적으로 무장하면 된다. 기존에는 군사 무장이 힘이었지만, 이제는 기술 무장이 국가를 보호하는 길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이 독일의 중요 목표물 145개를 타격하는 데 2년이 걸렸다. 걸프전에서는 미국이 이라크의 중요 시설 198개를 공격하는 데 24시간이 걸렸다. 이제 1500개 공격 목표를 마비시키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한 시대가 됐다. 현대전은 과학기술 전쟁이다.
원래 전쟁은 로지스틱스(logistics)에서 결판난다고 알려졌다. 후방에서 지원해주는 군수 물자 조달이 결정적이다. 그래서 지휘관은 진격보다 후방의 보급선에 더욱 신경을 쓴다. 그런데 현대전의 로지스틱스는 더욱 복잡하다. 이제 병사 생필품과 무기 조달뿐 아니라 첨단무기의 소재·부품까지 관리해야 한다.
하나의 첨단무기가 만들어지고 정상 작동하기까지 필요한 부품과 원자재의 종류가 수만 개를 넘은 경우가 허다하다. 어느 하나의 부품 조달에 문제가 생기면 무기체제 전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소재·부품·장비의 공급망의 안정적인 관리가 중요해졌다. 각 부품의 생산과 특허 등의 지식재산권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제 군인들이 힘으로 싸우는 시대는 지났다. 전방과 후방이 따로 구별돼 있지 않다. 미사일이 수백㎞ 날아다니는데 전·후방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전선에 서 있는 병사는 총을 한 방 쏘지도 않았는데, 전쟁이 끝나 버리는 시대다. 이러한 시대에 병사 숫자에 연연하는 국방전략은 20세기 관념이다.
인구 감소 때문에 국방자원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연구개발 분야에 배정하던 전문연구요원 숫자를 줄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구시대로 역행하는 정책이라 생각한다. 한 사람의 우수 인력이 총을 들고 휴전선을 지키는 것과 첨단무기를 개발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국방에 도움이 될까.
군에는 직접 전투에 관여하지 않는 인력이 많다. 수송·취사·경비·관리 등의 분야다. 이런 분야를 민간 업체에 외주를 주면 정규군을 소수 정예로 전투에 집중할 수 있다.
또 이런 국방 지원업체 양성은 일자리 창출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전·후방 구별 없고, 민간인·군인 구별 없고, 군사·민간 기술 구분이 없다. 온 국민과 국가 전체가 국방을 한다고 생각하면 새로운 국방전략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