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이 지난 3일 오전 관사 거실에서 도쿄올림픽 탁구경기를 거꾸로 설치된 TV를 통해 시청하고 있다. |윤희일 선임기자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이 TV를 보고 있는 사진을 거꾸로 게재했다. TV를 보는 이광형 총장이 거꾸로 보인다. 사진을 거꾸로 게재하는 아이디어 역시 이 총장이 냈다. |윤희일 선임기자
‘기습 공격’은 늘 유효한 법이다. ‘괴짜 총장’의 본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괴짜 취재’가 필요했다. 총장실에서 만나자는 것을 굳이 집(공관)에서 만나자고 우겼다. 기자 입장에서는 기습 공격이었다.
지난 3일 오전 대전 유성구 카이스트(KAIST, 한국과학기술원) 총장 공관을 기습 방문했다. 목적은 하나였다. 이광형 총장(67)이 TV를 거꾸로 본다는데 진짜일까. 진짜로 24시간 내내 거꾸로 TV를 볼까. 우선 이런 궁금증을 풀어보고 싶었다. 거실에 있는 TV를 기자가 직접 켰다. 때마침 2020도쿄올림픽 여자 탁구 복식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선수들의 머리는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선수가 친 공이 아래로 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총장은 거실에 서서, 거실을 오고가면서, 소파에 앉아서 천연덕스럽게 경기를 관전했다.
“늘 이렇게 봐요. 전혀 이상하지 않아요. 모든 것을 거꾸로 보고, 거꾸로 생각하는 습관을 키우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나올 수가 없거든요.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좋다, 인정한다. 늘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싶어하는 이 총장은 그렇게 TV를 보는게 좋다고 치자. 그렇다면 가족은 어떻게 하나.
“가끔 손녀들이 놀러오는데 처음에는 거실 바닥에 누워서 거꾸로 보더라고요. 지금은 아내나 손녀들이나 아무렇지도 않게 거꾸로 봐요.”
이 총장은 “15년 전부터 TV를 거꾸로 보기 시작했다”면서 “나 스스로를 자극하기 위한 것, 나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 나 스스로을 안주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뭐든 거꾸로 본다”면서 “강의자료도 거꾸로 본다”고 털어놨다. 공관에서 나오면서 TV와 TV거치대를 자세히 살펴봤다. 처음 설치할 때부터 거꾸로 고정 설치해 돌리거나 바로 세울 수가 없게 돼 있었다.
요즘 카이스트가 거센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지난 3월 취임한 이 총장의 ‘변화에 대한 요구’가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뭘까요.”(기자)
“학생들에게 공부를 덜 시키는 겁니다.”(이 총장)
예상을 벗어난 답변이 나왔다.
“우리 학생들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합니다. 전공은 깊이 파고 드는데 세상을 보지 못해요. 그러니까 꿈이 작지요. 우리 카이스트 학생들은 이제 공부를 조금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공공부는 10% 줄이라고 했어요. 그 시간에 여행도 하고, 독서도 하고, 연애도 하라고 했고요. 세상을 알아가야만 큰 꿈을 가질 수 있거든요. 세상을 알게 되면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되고, 자신이 인류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도 가질 수 있게 되고요.”
“취임 후 무슨 일을 했습니까.”(기자)
“실패(失敗)연구소를 만들었어요.”(이 총장)
질문과 답변이 갈수록 이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지난달 1일 실패연구소를 발족시켰다고 했다. 그동안 국내·외 연구에서 실패한 사례를 찾아내 그 속에서 성공의 길을 찾아보자는 게 연구소 설립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남들이 성공한 연구를 따라가면 길이 없거든요.”
이 총장이 강조하는 것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연구를 따라가지 말고, 새로운 연구를 하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야만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고 그는 굳게 믿는다. 그는 연구실 1개당 1개 이상의 ‘세계 최초 연구’를 시도하는 ‘1랩 1최초’ 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연구해 놓은 것을 뒤쫓아가거나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다르게 가는 것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면서 “그레서 ‘세계 최초 연구’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교육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장은 한국을 ‘코로나19 백신도 못 만드는 처량한 신세’라는 표현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백신을 못 만드는 이유는 너무가 간단하다”면서 “연구하는 의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우수한 인력을 뽑아서 의학을 가르친 뒤 인턴·레지던트 과정을 밟지 않은 채 연구소나 기업에 들어가 백신 개발 등을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카이스트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와 함께 총장실로 향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카이스트 교수 초임 시절, 뭔가 좀 달라보이기 위해 검정색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던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도 했다. 잘 알려진대로 이 총장은 1999년 방영한 TV 인기 드라마 <카이스트> 속 괴짜교수의 모델이다.
카이스트 총장실의 이광형 총장 책상 옆 기구표가 거꾸로 붙어있다. 그는 기구표를 거꾸로 붙이면 “내가 누구를 섬겨야 할지 보인다”고 말했다. 모든 구성원을 섬기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가 보인다. |윤희일 선임기자
총장실도 달랐다. 그의 책상 옆에는 카이스트의 조직도가 거꾸로 붙어 있었다. ‘거꾸로 조직도’와 ‘거꾸로 세계지도’는 그가 집무실을 옮길 때마다 따라다니는 단골 소품이다. 그는 “조직도를 거꾸로 붙이면, 내가 누구를 섬겨야 하는지가 보인다”면서 ‘내가 일하는 조직을,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새로운 각도로 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카이스트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계획입니까.”(기자)
“카이스트를 학생들의 ‘신나는 놀이터’로 만들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신나게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들어주면, 저절로 세계 최고의 대학이 될 거라고 믿고 있거든요.”(이 총장)
이 총장은 학생들이 딴 짓을 하면서 놀기를 원한다. 그래서 ‘과학’을 내세우는 카이스트 캠퍼스에 미술관을 짓기로 했다.
“남이 하지않는 것에 도전해서 세계 최고가 되려면 그동안 하던 것에서 탈피해야 하거든요. 그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예술이지요. 미술을 통해 학생과 교수들의 생각에 새로운 자극을 주려고 합니다. 예술과 과학연구는 창의성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총장은 서울대와 카이스트에서 산업공학 학사·석사 학위를, 프랑스 응용과학원(INSA) 리옹에서 전산학 석·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1985년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로 임용됐으며 지난 3월 카이스트 총장에 취임했다. 1990년대 전산학과 교수 시절 김정주(넥슨)·김영달(아이디스)·신승우(네오위즈)·김준환(올라웍스)씨 등 1세대 벤처 창업가들을 배출해 ‘카이스트 벤처 창업의 대부’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