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기부금 1199억원 모은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
”바이오시장, 반도체보다 크고 자동차 맞먹어
연구력 갖춘 의사과학자 있어야 공략 가능
환자 치료보다 연구하고 창업해 돈 벌어야
해외 대학과 손잡고 세계 10대 대학으로 도약”
올해 대입 정시모집에서 서울대·연세대·고려대 합격자 중 4분의 1 이상이 등록을 포기했다. 입시 전문가들은 자연계 학생들이 대거 의약학 계열로 빠져나간 결과라고 해석했다. 심지어 삼성전자 채용이 보장되는 계약학과인 연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합격자들도 전원 등록을 포기했다. 시장에선 반도체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인데 왜 학생들은 외면할까.
이 총장은 지난 2021년 2월 취임해 이제 4년 임기의 절반을 마쳤다. 전산학과 교수 시절 고(故) 김정주(넥슨), 신승우(네오위즈), 김준환(올라웍스), 김영달(아이디스) 등 국내 1세대 IT(정보기술) 창업가들을 배출한 ‘벤처 대부’답게 2년 동안 대학을 벤처처럼 혁신했다. 실패한 연구에서 배우겠다고 실패연구소를 설립했으며, 하루 1억씩 발전기금을 유치하겠다고 공약하더니 1199억원을 기부받아 목표를 넘어섰다. 미국에 캠퍼스를 세워 학생들의 꿈 크기를 키우겠다는 비전은 뉴욕대와 조인트(joint·공동) 캠퍼스를 운영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다.
-반도체는 한국의 핵심 산업으로 어느 곳보다 취업이 잘되지 않나. 왜 학생들이 외면할까.
“개인이 있고 국가가 있다. 쉽게 말해서 사회적인 대우가 좋아야 그쪽으로 진학한다. 사실 같은 성적으로 의대에 가면 더 대우받지 않나.”
-의대를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문제인가.
“사회적 분위기라는 건 막연하고 무책임한 얘기이다. 문제를 풀려면 우선 대통령이 관심을 둬야 한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만들고 자주 가서 살피니 나라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다행히 그동안 방임하던 일을 지금 대통령이 하고 있다.”
-대통령이 나섰다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우선 사회 보상 시스템을 손 봐야 한다. 의대는 공부하기 힘들다는 걸 다 알면서도 보상이 크니 간다. 돈 많이 받고 오래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의사 정원을 동결시켜 희소성을 높인 것 아닌가. 그걸 풀어 균형을 맞춰야 한다.”
-카이스트도 의대를 신설하려고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
“우리는 환자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신약 개발하는 의사과학자를 배출할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과기의전원)을 만들려고 한다.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가 6000억달러 정도 된다. 바이오의료산업은 2조달러이다. 자동차산업과 비슷하다. 그런데 한국은 바이오의료 시장 중 1%만 차지하고 있다. 의사과학자가 배출돼야 이 시장을 노릴 수 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길이라고도 했다.
“우리 사회의 청년 실업자가 32만명이다. 그런 불만 세력을 계속 두면 나라가 유지되겠나. 청년 실업을 해결하려면 국내총생산(GDP)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잘하는 반도체, 제철, 조선, 자동차는 학교에서 100점 만점에 97점, 98점을 받는 수준이다. 더 잘하기 무척 어렵다. 반면 바이오의료는 40~50점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70~80점으로 올리는 게 쉽다.”
–왜 의사과학자가 필요한가.
“코로나19 대유행 때 우리나라가 백신이나 치료제를 만들지 못했던 것도 의사과학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노벨상 받는 생화학자 셋 중 한 명이 의사이고, 외국 유명 제약사 연구자의 셋 중 한 명도 의사이다.”
–현재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도 의사과학자를 배출하고 있다.
“의과학대학원은 의사가 된 뒤에 대학원에 와서 연구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연구하는 의사도 종류가 여러 가지다. 대학병원에서 연구하는 의사는 의과학대학원에서 길러냈다. 이제 환자 치료보다 연구가 먼저인 의사, 창업하는 의사를 길러내야 한다.”
–과기의전원이 연구하는 의사를 양성하는 데 더 나은 까닭은.
“의사 면허를 따고 대학원에 오면 나이도 들고 결혼도 해 짊어진 게 많아진다. 위험을 감수하기 어렵다. 과기의전원에서는 4년 간 의학과 과학을 3대 1 정도로 배워 의사가 되고 이후 3년 간 공학박사과정을 밟는다.”
–과거 여러 의대가 의사과학자를 양성하겠다고 의전원을 운영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카이스트 입학생은 성향이 다르다. 공부 잘하면 서울대 가라, 의대 가라 하는데 카이스트 학생들은 연구하는 게 좋다고 굳이 지방인 대전으로 온다. 서울 지역 대학원이 다 미달이지만 카이스트는 경쟁률이 여전히 높다. 그런 학생들을 의사과학자로 키우자는 것이다.”
–의료계는 카이스트 의대 신설에 대해 곱지 않게 본다.
“반발이 심하다. 그런데 지금 의대들이 가장 부족한 게 연구이다. 유명 의대들이 만약 카이스트가 과기의전원을 한다면 우리와 같이 하자고 한다. 의사 교육은 기존 의대의 도움을 받고 우리는 연구역량을 지원할 수 있다. 정치적 결단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말이다.”
–기존 의대도 연구 기능을 강화하면 되지 않나.
“간단히 말해 비즈니스 모델이 우리와 다르다. 대학은 등록금 받고, 대학병원은 환자를 봐야 월급을 주고 기관을 운영할 수 있다. 그런데 카이스트는 정부에서 받는 돈이 예산의 22~23%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연구과제 수주해서 번다. 교수가 연구비 따오면 학교가 일부를 떼서 학교를 운영한다. 카이스트 의대도 같은 방식으로 하니 환자 보지 않고도 운영할 수 있다.”
––카이스트 과기의전원도 연구로 먹고 산다는 말인가.
“과기의전원 교수는 연구 잘하는 사람을 뽑을 것이다. 연구과제 수주하고 논문 쓰면서 의대를 운영하는 것이다. 하버드 의대 매사추세츠종합병원(MGH)이나 메이요 클리닉도 모두 그런 연구 중심 의대이고 병원이다. 카이스트는 이미 연구중심 대학이어서 바로 가능하다. 포스텍이나 서울대 공대도 마찬가지이다.”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
“상당히 높다고 본다. 그렇게 안 하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되겠나. 10년 뒤, 20년 뒤에도 새로운 코로나가 나타날 것이다.”
–카이스트 뉴욕 캠퍼스 설립은 어떻게 진행됐나.
“2021년 교포 사업가로부터 부지와 건물을 기부 받아 뉴욕에 글로벌 캠퍼스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대학을 세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임기 중에 첫 삽도 못 뜰 상황이었다. 그런데 뉴욕대가 당시 기사를 보고 우리에게 연락했다. 뉴욕대와 공동으로 연구실과 학위과정을 운영할 계획이다.”
–뉴욕대가 왜 카이스트와 손을 잡으려 하나.
“카이스트 교수들의 연구능력을 보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이 중국과 껄끄러운 관계가 되면서 한국이 중요한 파트너로 부상했다.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인 CES에서 한국 기업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왜 미국에 캠퍼스를 세우려 하는가.
“내 꿈은 카이스트를 세계 10위권 대학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 학생들은 능력으로는 매사추세츠공대(MIT) 학생에 뒤지지 않지만 꿈이 작다. 네이버나 카카오 만들겠다는 정도다. MIT 학생들처럼 세계를 이끄는 기업을 꿈꾸는 기회를 주고 싶다.”
–대전 본원에서도 건물 공사가 무려 16곳에서 진행된다고 들었다.
“등록금으로 운영하면 교수 정원을 늘리기 어렵다. 우리는 연구비로 먹고사니 필요한 교수를 늘릴 수 있다. 문제는 교수가 연구할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학과가 돈을 모으면 대학이 지원해서 연구할 건물을 짓도록 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말한 업(業)의 본질대로 하는 것이다.”
–업의 본질이라니 무슨 말인가.
“이 회장은 백화점은 부동산업이라고 했다. 목 좋은 곳에 백화점을 세우면 좋은 업체들이 들어와 물건을 팔고 임대수입을 거둔다는 것이다. 학과의 영어 이름이 백화점을 말하는 ‘디파트먼트(department)’ 아닌가. 백화점에 좋은 가게를 입점시키듯 학과가 연구 잘 하게 공간을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총장은 벤처 대부로 통한다. 임기 동안 학생과 교수 창업도 늘었다고 들었다.
“과거에는 교수 창업을 권하면서도 월급을 깎았다. 교수로서 임무를 다 하면 왜 깎아야 하나. 그런 일 막고 절차도 줄였더니 교원창업이 2020년 4건에서 2021년 11건, 2022년 18개로 늘었다. 학생창업도 매년 60건 정도 된다.”
–하지만 카이스트를 모델로 한 싱가포르 난양공대가 아시아 대학 평가에서 카이스트를 앞섰다.
“정부가 대학에 돈을 몰아주고 간섭을 안 한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그럴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못할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세계적인 기업도, 운동선수, 음악가도 길렀다. 정부 탓, 예산 탓만 할 게 아니다.”
–총장은 2년간 기부금 1199억원을 유치했다. 뉴욕대 캠퍼스에도 기부금이 온다고 들었다.
“미국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기부금이 모이고 있다. 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카이스트의 비전을 보고 기부하는 것이다.”
–카이스트가 한국 대학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도 그런 성과 때문인가.
“한국 교육을 대통령이 바꿀 수 있나 장관이 바꾸나. 카이스트가 바뀌면 된다. 우리나라 기준은 서울대이다. 기부금이 카이스트에 몰리니 서울대도 적극적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면 다른 대학도 바뀐다.”
–그렇지만 해외 유명 대학과 비교하면 아직 기부금 규모가 작지 않나.
“미국 사람이라고 우리보다 기부에 대한 생각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조세 제도가 유리하다. 조금 손해라도 기부해서 명성 얻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기부금에서 세금을 떼는 근시안적 정책을 만들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다.”
–대학 규제도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 대학은 등록금을 가지고 운영한다. 등록금 동결을 풀어야 연구 장비도 사고 연구실도 운영할 수 있다.”
–카이스트는 등록금은 문제가 없지 않나,
“카이스트 규모가 다른 대학의 절반이나 3분의 1 정도이다. 축구로 따지면 우리는 11명 뛰는데 외국은 22명인 것과 같다. 지금 교수가 675명인데 내 임기 중에 750명까지 늘릴 계획이다.”
–교원 평가에도 제약이 많다고 들었다.
“연구중심대학이 연구능력을 기준으로 교수를 평가했는데 교육부가 제동을 건다. 해임된 교수가 논문 숫자나 교육 시간에서 문제가 없다고 교육부 소청위원회로 가는 것이다. 교육부가 정량적으로 판단해 문제가 없다고 하면 카이스트가 해임 결정을 재고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연구는 논문 숫자로 평가할 수 없다. 연구중심대학이 연구능력을 기준으로 교수를 평가하지 못하면 말이 되나. 이 점을 꼭 말하고 싶다.”
–신임 교원 심사는 빠지지 않고 들어간다는데.
“학교 행정은 대부분 부총장들에게 맡긴다. 하지만 신임 교수를 만나는 일은 빼놓지 낳는다. 오늘도 1시간 동안 신임 교수 인터뷰를 하고 왔다. 처음에 올바른 메시지를 주려고 그런다. 논문 많이 쓰라고 하지 않고 세상에 없는 연구를 시작하라고 한다. 세상에 나와 비슷한 연구를 두세명 정도면 몰라도 10명이 한다면 아예 하지 말라고 한다.”
☞이광형 총장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나와 1980년 카이스트에서 산업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원(INSA) 리옹 캠퍼스로 유학을 가서 1985년 전산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해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교수 시절 발상의 전환을 위해 TV를 거꾸로 보고, 학교 연못에 거위를 풀어놓는 기행으로 유명했다. 제자들에게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도록 강조했다. 1999년~2000년 SBS TV드라마 ‘카이스트’에서 빨간색 스포츠카를 몰던 괴짜 교수의 실제 모델이다.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으로부터 515억원을 기부받아 카이스트 바이오및뇌공학과,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같은 융합학과, 대학원을 신설했다. 카이스트 국제협력처장·교무처장·문술미래전략대학원장·교학부총장을 지냈으며 2021년 17대 총장에 취임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이다. 프랑스정부훈장,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 녹조근정훈장을 수상했다.